“수천년 이어온 우리 의술 세계 제일로 만들자”
‘고려의학’으로 침뜸 키운 북한…서양의학 중심 남한 의료체제 자성 계기
지난 2월 26일 오후 3시 고려의학과학원 3층 강당에선 남과 북의 민족의학 전문가 1백여 명이 한 자리에 모인 가운데 역사적인 학술토론회가 열렸다.
남측의 뜸사랑·정통침뜸연구소(대표 김남수, 남수침술원 원장)와 국제자연치유의학연맹(총재 전세일, 포천중문의대 대체의학대학원 원장)이 북측의 고려의학과학원과 공동으로 주최한 이번 행사는 남북의 침뜸의학 관계자들이 임상연구 결과와 정보를 서로 나누고 한민족 전통의술의 핵심인 침뜸의학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자는 차원에서 추진됐다.
이날 학술토론회에서는 4명의 남북 학자와 전문가들이 발제자로 나섰다.
남측에선 최고의 침뜸의학 권위자인 김남수 원장,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의 통합을 모색해온 전세일 원장이 각각 ‘통증 없고 흉터 없는 화상(火傷) 침 치료’와 ‘전통 침술학의 과학적 연구-자율신경과 내분비학적 접근’을 주제로 발표했다.
북측에선 현철 부원장과 김숙영 침구연구소 침구2연구실 실장이 각각 ‘우리나라 침구학 발전의 실태와 전망’과 ‘귀(耳)의 혈(穴) 자리로 하는 건강진단’을 주제로 발표했다.
그러나 이날 행사의 진정한 의미는 구체적인 토론 내용보다 어쩌면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측 대표로 나와서 행사를 주관한 현철 고려의학과학원 부원장의 다음과 같은 환영사에서 기자는 그 의미의 일단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리 선조들이 수천년을 내려오면서 창조하고 발전시켜온 침구술은 우리 민족의 귀중한 문화유산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민족의 자랑인 침구술을 더욱 발전시켜 세계에서 으뜸가는 의술로 만들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주지하다시피 북은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민족의학을 적극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왔다. 청기와를 얹은 웅장한 4층 석조 건물을 가지고 있는 고려의학과학원은 그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남에서 민족의학은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해온 것이 사실이다. 1962년 군사 쿠데타 직후 국민의료법이 서양의학 중심의 의료법으로 개정되면서 침구사 양성제도가 폐지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국가 예산으로 운영되는 국?공립대에 한의대가 설치된 곳이 단 하나도 없다는, ‘알고 보면 이상한 현상’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북의 침구학 현황을 상세히 소개한 현철 부원장의 발제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다음은 그의 발제 내용에다 주변 취재를 통해 얻은 정보를 덧붙여 정리해 본 것이다.
우선 북에서는 민족 주체성을 살린다는 의미로 민족의학 혹은 동양의학을 ‘고려의학’(高麗醫學)이라는 단일한 명칭으로 부른다. 실제로 북은 해방 이후 고려의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전력투구해 왔는데, 덕분에 고려의학에서는 치료약으로 식물, 동물, 광물 등 1천4백여 종이 개발, 이용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침, 뜸, 부항과 각종 민간의료 등 5만여 종의 처방도 병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그런 결과 침뜸이 북의 보건의료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60%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료소 단위까지 합치면 그 비중이 더욱 높아지는데, 환자의 80% 이상을 침과 뜸으로 치료한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현상을 북의 경제난과 연결해 폄하하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서구에서 현대의학의 한계성을 인정하고 대체의학(代替醫學)이란 이름으로 동양의학을 주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보건기구(WHO)도 침뜸을 1차진료로 활용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양의학 일변도로 편향돼 있는 남한의 의료체계를 되짚어볼 필요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의학이 북의 보건의료를 주도할 수 있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현철 부원장은 ‘당과 국가의 전략과 정책 및 법 제도의 완비’를 첫 번째 이유로 꼽았다.
그런데 북에서 침구를 비롯한 고려의학을 국가 차원에서 적극 지원, 장려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 부원장은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침구에 대한 ‘홀시’(홀대를 뜻함)와 ‘차별’이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고백했다. 남과 마찬가지로 북에서도 서양의학을 우월하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신의학’(현대의학을 뜻함)과 전통의학을 올바르게 배합하자는 ‘옳은 관점’이 제시되면서 고려약(高麗藥)과 함께 전통의학의 양대 축을 이루고 있는 침구학(鍼灸學)이 ‘자기발전의 전면적인 개화기’를 맞이하게 됐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물론 ‘옮은 관점’을 제시한 주인공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라는 것이 현 부원장의 설명이다.
실제로 현 부원장이 필자 중 한 명으로 참여한 <고려임상의전>(2002년 발간) 첫머리에도 “고려치료 방법을 널리 받아 들여야 하겠습니다. 고려의학과 신의학을 옳게 배합하여 발전시키는 것은 인민보건 사업에서 우리 당이 견지하고 있는 중요한 방침입니다”(김정일선집 4권 126쪽)라는 대목이 가장 굵은 글씨로 기술돼 있었다. 아울러 1980년 4월 제정된 인민보건법은 고려의학의 안정된 발전을 한층 보장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현철 부원장이 고려의학 활성화의 두 번째 이유로 꼽은 것은 ‘정연하게 수립된 의료봉사체계’이다.
물론 그 중심에는 전통의학 분야에서 종합적인 고려치료봉사기지, 국제의료교류기지로써의 역할과 사명을 담당하고 있는 고려의학과학원이 있다. 그리고 남의 광역자치단체에 해당하는 23개 시?도별로 고려병원이 세워져 있고, 남의 기초자치단체와 마을에 해당하는 5천여 단위별로도 각급 병원과 진료소가 설치돼 있다.
각급 병원과 진료소에서도 침구 등 고려의술이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현 부원장은 “1953년부터 모든 인민에게 전반적인 무상치료가 실시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북은 고려의학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하여 ‘침구학의 과학화와 현대화’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침구연구의 중심 역할도 고려의학과학원이 맡고 있는데, 이곳에서 침과 뜸을 비롯해 경락, 부항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집중적으로 진행된다. 아울러 각 시?도별 의학대학에도 침구연구실이 설치되어 있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종사하는 연구진에 의해 약 70종의 새로운 치료법이 창안되었으며, 약 1백종의 교과서와 참고서가 발간되었다고 한다.
북에서는 고려의학 전문의사를 양성하기 위한 각종 기관도 운영되고 있는데, 최고의 교육기관은 물론 고려의학과학원이다. 각 시?도에 있는 의학대학과 의학전문학교에도 고려의학부를 별도로 개설하고 있다(이 중에서 10여 개의 의대에는 박사원이 설치돼 있다).
1년 3개월 코스의 통신반도 운영되고 있는데, 남측의 방송통신대를 연상하면 된다. 재능과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려의학 전문의사가 될 수 있는 길을 터놓은 셈이다. 참고로 약학대학에도 고려약 전문 단과대학을 따로 두고 있다고 한다.
한편 남측의 김남수 원장은 자신이 직접 임상시험을 통해 개발한 화상 침 치료 방법을 소개한 뒤 북측에서도 이 방법을 도입할 것을 제안했다. 70여 명의 북측 침뜸 전문가들은 침으로 화상을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시하며 진지한 관심을 보였다. 특히 3도 화상을 입은 가스배관공의 얼굴 상처가 20일도 안돼 침으로 흉터 없이 깨끗하게 치료된 과정을 보여준 자료사진을 보고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김 원장은 작년 8월 방북 당시 리종혁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을 만나 이 치료 방법을 상세히 소개한 적이 있다. 그때 리 부위원장은 그 방법을 북한에도 꼭 소개해 달라고 특별히 부탁했는데, 그것이 이번 주제 발표의 계기가 됐다고 한다.
서양의학을 전공하고도 동양의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온 전세일 원장이 주제발표를 마치면서 했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기자는 통일침뜸 남북교류가 추구해야 할 미래가 어떤 상을 갖게 될 것인지 상상해볼 수 있었다.
“동양의학은 동양의학대로 장점과 단점이 있고, 서양의학은 서양의학대로 우수성과 한계성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남과 북의 의료체계도 장단점이 있습니다. 이 양자의 장점만 통합시킨다면 우리는 세계 의료를 주도할 수 있는 한 차원 높은 종합의학이나 전일의학을 창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고려의학을 통해 전통의학을 지혜롭게 계승, 발전시켜온 북측이 있기에 우리 민족은 그러한 꿈을 현실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평양=시민의신문 정지환 취재부장 ssal@ngotimes.net
남에서 온 사람들
통일침뜸 대장정의 동반자들
제1회 통일침뜸 학술토론회에 참석한 남측 인사는 약 30명이다. 대다수가 전통의학, 대체의학, 자연의학 분야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의과대나 한의대를 졸업한 의사가 아니면 치료 행위를 할 수 없도록 의료법이 1962년 개정되면서 불법화된 민간의료에 종사하는 사람도 소수이긴 하지만 있었다.
일행 중에는 이른바 대체의학 분야에서 뛰고 있는 의과대 교수와 의사들이 주류를 이뤘다. 대체의학 분야의 최고 권위자인 전세일 원장이 이끄는 국제자연치유의학연맹에서 활동하는 오홍근 포천중문의대 교수, 김수자 수원여대 교수, 우봉식 한양재활의학과의원 원장, 신정빈 일산병원 재활치료센터 소장 등이 바로 그들이다. 오 교수는 한국아로마테라피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아로마 전문가이고, 김 교수는 발 관리 전문가이다.
얼마 남지 않은 ‘합법적 침구사’ 중의 한 명으로 ‘침구사 합법화’를 위해 여생을 바치고 있는 김남수 원장이 단장을 맡은 남측 대표단에는 대안의료 분야에서 활동하는 인사들도 포함됐다. 귀(耳)의 혈(穴)을 이용해 질병을 예방하고 관리하는 한중이혈건강요법학회의 이현중 회장, 동양의학과 자연치유 분야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양동춘 녹색대학 자연의학과 교수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황해도가 고향이라는 최희규 수원여대 이사장은 민족의학 분야에서의 학술교류를 모색하기 위해, 김근식 동방침구제작소 사장은 북한과의 침구기기 경제교류를 모색하기 위해 방북여행에 동참했다. 이밖에도 뜸사랑의 김학진 부회장, 전영옥 교수, 이락호·백운칠·홍다영 봉사단원, 이석기 침술연합회 회장 등이 동행했다. 손중양 정통침뜸연구소 이사가 교류사업 실무를 총괄했다.
2004.3.8 / 시민의신문 /정지환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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