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禹奉植/뜸사랑 의학침뜸연구회
지난 연말부터 준비해온 북경 방문 일정을 논의하려고 설 연휴가 지난 즈음에 뜸사랑 사무실에 들렀다. 그 자리에서 灸堂 선생님께 "선생님 제가 3월 초순경에 북경을 방문하여 중국의 鍼灸名醫를 몇 분 만나보고, 오는 6월 월드컵을 즈음해서 한국으로 초청을 하려 합니다."라고 말씀 드렸더니 선생님께서는 "그래? 그럼 이번엔 나와 함께 다녀올까?"하고 말씀하시기에 "선생님께서 가신다면 저야 다시없는 영광이지요."라고 대답하였다.
평소 같으면 1주전에만 예약해도 되었던 북경행 비행기표인데 출발 2주전에 표를 신청했음에도 불구하고 개학시즌이어서인지 중국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표를 구하지 못하여 발을 동동 구르다가 출발 5일전 선생님의 힘(^.^)으로 겨우 좌석 예약을 받고서야 한시름이 놓였다.
드디어 3월 1일 출발하는 날 아침. 오전 9시 50분 아시아나 OZ331기를 타기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나 선생님을 모시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짙은 안개가 앞을 가렸다. 빙판길을 가듯 조심조심 공항고속도로를 가는 도중 내가 "선생님 얼마 만에 북경에 가시는 건가요?"라고 묻자 "한참 되었지. 중국사람들이 한국 사정도 몰라주고 나더러 나이 많다고 세대교체 하라는 소리들을 해서 그 소리 듣기 싫어 안 갔으니까 한 3년 되었나?"라고 조용히 대답하셨다. 그 말씀이 마치 지난 시절 굴곡의 역정(歷程)을 토해내시는 것 같아 한참동안 귓가에 맴돌았다.
북경으로 가는 비행기 속에서 선생님은 젊은 시절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노동일 하던 이야기, 정미소를 하다 실패한 이후 침뜸을 업으로 삼아 일하시면서 끊어져가는 침뜸의 맥을 잇고자 밤낮 애쓰시던 때를 말씀하셨다. 그리고 정신없이 사시느라 집안에 신경을 쓰지 못해 예전 살던 집의 난간 손잡이가 없는 계단에서 낙상으로 머리를 다치신 사모님의 이야기를 하셨다. "그 일 생각하면 가족들한테 내가 미안하지." 하시면서 눈가에 이슬이 젖으신다. 선생님의 지난 미수(米壽) 인생 여정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어느새 진한 스모그 속으로 멀리 북경공항이 보였다.
북경 도착 첫 날. 우리를 안내해준 북경중의대 교수인 김영삼 원장이 최근에 개원 허가를 얻은(중국은 의료기관의 개설이 신고제가 아닌 허가제임) 중국 최초의 中韓우호 병원인 '望京新星醫院'을 들러 시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튿날의 북경 체류 일정에 대해 듣고 호텔로 돌아와서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 일과를 수첩에 깨알같은 글씨로 정리하시는 모습에서 선생님의 치밀한 성품을 엿볼 수 있었다.
북경에서 둘째 날. 호텔을 나오기 전에 잠시 짬이 나서 선생님과 서로 품앗이 삼아 뜸을 뜨고 난 후 世界鍼灸學會聯合會(世針聯) 사무실을 방문하였다. 때마침 독일의 의과대학생 40여명이 4주간의 일정으로 世針聯의 국제침구교육센터에서 침구교육을 받고 있었다. 世針聯 外事處의 宋莉 주임의 이야기가 해마다 서양의학을 공부하는 많은 학생들이 世針聯의 교육센터에 와서 일정시간의 교육을 받고 있으며, 해당 국가의 의과대학에서는 世針聯의 교육학점을 동양의학 학과목 점수로 그대로 인정해 주고 있다고 했다. 世針聯 교육센터에서는 현재 7개국어로 강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비록 서양의학을 먼저 공부했지만 침뜸에 매료되어 2년여를 침뜸공부를 하고서도 환자에게 침뜸 시술을 하면 의료법 제25조 1항에 의해 불법으로 내몰리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비추어 훨씬 열려있는 저들의 사고방식과 의료체계가 부러웠다.
이어서 만난 世針聯의 鄧良月 주석은 호방한 성격이지만 灸堂 선생님에 대해서는 깍듯이 예의를 지켜 배려를 해 주었다. 鄧 주석이 주관한 오찬에서는 돼지고기와 닭이 주 메뉴로 구성된 처음 맛보는 정통 중국 요리들이 식탁 가득히 나왔다. 요리가 나올 때마다 鄧 주석이 선생님에게 음식을 제일 먼저 떠주는 모습은 일품 요리의 맛뿐만 아니라 선생님에 대한 그들의 대우와 존중의 마음가짐을 알게 해 주었다.
북경 셋째 날. 오전에 북경중의대 鄭守曾 총장이 인사차 직접 호텔로 찾아와 선생님과 다과를 나눴으며, 오후에는 북경시내의 자금성 관광에 나섰다. 택시에서 내리자 길 건너편으로 천안문 광장이 눈앞에 들어왔다. 광장은 전국인민대표자대회 관계로 출입을 통제하여 들어가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세계에서 가장 큰 광장이라고 하는 천안문 광장의 웅대한 면모를 접하니 마치 1966년 문화대혁명 당시 백만이 넘는 홍위병이 운집하여 궐기하던 거센 숨결과 1989년 6월 천안문 사태의 피비린내가 느껴지는 듯했다.
명청조 시대에 왕궁 정문으로서 황제가 조서를 내리던 곳이었다는 천안문의 성문 아래 금수교를 지나 천안문 성루로 올라가자 광장 서측의 인민대회당과 동측의 역사박물관, 그리고 남측의 모택동주석 기념당과 정양문의 웅장한 자태가 광장과 혼연일체가 되어 장려한 한편의 화폭으로 눈앞에 펼쳐졌다.
천안문을 지나자 1407년 명나라의 영락제(永樂帝)가 난징(南京)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천도하기 시작할 때부터 건립하여 1420년에 완성하였다는 자금성의 남문인 오문(午門)이 나왔다. 오문을 지나 한 줄로 늘어선 태화문(太和門)·태화전(太和殿)·중화전(中和殿)·보화전(保和殿)을 거닐면서 수 백년 전 황제의 위용을 음미하며 지나고 나니 황제의 내정(內廷)이 나타났다. 황제의 사생활 공간이었다고 하는 내정은 공식 집무를 수행하던 남측의 건물들에 비해 내부가 비교적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는데 황제가 신혼 첫날을 보냈다고 하는 곤녕궁(坤寧宮)을 지나고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을 지나 자금성의 북문을 나오자 4차선 도로 건너편으로 경산공원(景山公園)이 반겨주었다.
경산공원은 해발고도 88.7m로 가운데의 만춘정(萬春亭)에 올라가면 자금성을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자그마한 산으로 금(金)나라 때 이궁(離宮)을 만들면서 지금의 베이하이(北海)를 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들었는데 원(元)나라 때는 궁정의 정원으로 쓰였다고 하며, 명(明)나라 때인 1403∼1424년에 자금성의 퉁쯔허(筒子河)를 판 흙을 쌓아 5봉(峰)을 만들고, 건륭제(乾隆帝)가 그 봉우리 위에 만춘정(萬春亭)을 비롯하여 산정(山亭)을 세워서 옛 이름은 완서우산(萬壽山)이며 명청 때는 자원(紫苑)이라고 불렀다. 1644년 이자성의 난 때 농민 봉기군이 베이징을 공격하자 숭정제(崇禎帝)가 자금성을 빠져 나와 경산공원으로 도망쳤다가 자금성을 내려다보고 자신의 신세가 한탄스러워 동산록(東山麓)에 있는 괴목에 목을 매 자살하였다는 비운의 역사를 담고있는 산이기도 하다.
경산공원을 가다보니 몇 시간째 쉬지 않고 계속 걸어다닌 탓에 약간은 숨도 차고 다리도 무거워 선생님의 안색을 살피니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힘찬 발걸음으로 오시는 모습이 누가 40대고 누가 80대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북경에서 灸堂 선생님과의 마지막 날. 5박6일간 머물게 되는 필자와 달리 선생님은 이날 오전에 귀국해야 하는 바쁜 일정인 관계로 아침 일찍 두침(頭針)과 자오유주(子午流注)의 명인이라는 북경중의대 풍춘상(馮春祥) 교수의 개인 진료실에 들러 침을 시술하는 것을 보고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북경공항으로 선생님을 배웅했다. 북경공항은 한국과 달리 발권 수속을 할 때 탑승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까닭에 출국 창구 입구에서 배웅을 해야 했다. 북경 방문의 일들이 즐거우셨는지 환한 표정으로 공항 탑승장으로 들어가시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노라니 북경에서 함께 한 3박4일 동안의 선생님 모습과 지난 세월 동안 온갖 풍파를 넘어 꿋꿋이 살아오신 선생님의 88년 인생이 오버랩되어 선생님의 뒷모습이 공항 저편으로 멀리 사라진 후에도 시야에 오래 남아 있었다. (한양재활의학과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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