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순희/뜸사랑 정통침뜸교육원 교수
5월 초의 어느 날,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뜸사랑의 교수님 몇 분과 모처럼 약속을 하여 <인체의 신비전>을 보기 위하여 창경궁 옆의 과학박물관을 찾은 시간은 오후 두어 시 경이었다. 너무나 감명 깊게 보셨다는 주위 분들의 말씀을 많이 들었던 터라 과연 어떤 느낌일까 하는 설레는 기대감을 안고 긴 복도로 들어서는 순간 엉뚱하게도 머리를 스친 생각은 “아! 내가 이사하는 집에 왔구나”였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여러 번의 이사를 하게 되고 그 모습도 매우 다양하다. 집을 줄이거나 넓혀서 가기도 하며, 큰 도시로 가는가 하면 변두리의 외딴 곳으로 가기도 한다. 신생아가 태어나듯 이 세상으로 오는 이사가 있는가 하면 죽음을 통해 저 세상으로 가는 최후의 이사도 있겠다. 이사의 겉모습은 좀 다르겠지만 속 모습은 공통된 것이 있는 듯하다. 먼지와 함께 구석구석에 쌓아두었던 물건들을 내려놓고 종류별로 포장을 해 놓기도 한다. 더 이상 쓸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 한 쪽으로 몰아놓아 폐기물로 분류를 해 놓는다든가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주려고 손질을 잘 하여 한 곳에 쌓아 놓기도 한다.
이곳에 시신을 기증한 저들도 우리네와 비슷한 경험을 하며 이 세상을 살았을 것이다. 적어도 수 차례는 치렀을 버거웠던 이사에도 물리지 않았던지 죽음 앞에서도 무언가 남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을까 고민했던 사람들이라 여겨졌다.
전시되어 있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근육은 근육대로, 신경은 신경대로, 혈관은 혈관대로, 골격은 골격대로, 장기는 장기대로, 어느 여인은 아이를 잉태한 대로, 폐암을 앓는 대로 고스란히 손질하여 남겨두고 떠난 넋들의 사랑이 물씬 묻어나 살점 하나 하나와 골격 속까지 투명하게 비쳐지는 듯하다. 하여 그들의 영혼이 빠져나갔다고 여겨지는 통로인 방광경(膀胱經) 제2측선의 백호․혼문․지실․신당 등의 혈이 열려있지는 않을까 하여 유심히 들여다보곤 했다.
이곳 과학관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은 독일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해부학 교실에 있는 군터 본 하겐스 박사에 의해 개발된 새로운 처리과정에 따라 제작되고 보존된 해부학 표본들이다. 플라스티네이션(plastination)이라고 부르는 혁신적인 해부학 기술을 통하여 각 개의 근육 및 오장육부, 신경들을 단단하게 만들 수 있게 됨으로써 전신표본들은 원래의 모습 그대로 안정화되어 특정자세를 취할 수 있고, 기존 골격표본으로는 불가능했던 서있는 자세도 취할 수 있게 된다.
플라스티네이션이란 인간이나 동물의 표본 속에 반응성 플라스틱을 주입하여 세포를 경화(硬化)시킨 것이며, 인간의 몸을 교육적 목적을 가진 표본으로 보존하는데 가장 근대적이고 오래 지속시킬 수 있는 생생한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인류 역사의 거의 모든 시대와 문명, 종교를 통틀어 볼 때 죽음은 우리 존재의 끝이 아니라는 점이 주장되어왔다. 단지 죽음은 영혼(靈魂)이 정신의 세계로 넘어가는 전이과정(轉移過程)이라고 여겨진 것이 유대인, 기독교인, 불교인과 그밖의 종교사회에서 믿어졌으므로 시신(屍身)에 관한 생각은 2차적인 것이었다.
우리 몸의 약 70%는 수분으로 구성된다. 이 수분은 생존이나 부패를 위해 꼭 필요하다. 플라스티네이션에 의해 우리 조직(tissue) 안의 수분은 특별한 진공과정을 거쳐 실리콘 고무나 폴리에스테르 수지와 같은 반응성 플라스틱으로 교체된다. 인체세포와 자연적인 피부주름은 보존과정을 거치기 전처럼 아주 미세한 수준까지 그대로 유지된다. 건조하고 냄새가 없고 오래가고, 말 그대로 움켜잡을 수도 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플라스티네이션 표본은 의학 교육은 물론 관심을 가진 일반인들을 계몽시키는 데 매우 높은 가치를 지닌다. 플라스티네이션에 의해 조직 안의 수분은 특별한 진공과정을 거쳐 실리콘 고무나 폴리에스테르 수지와 같은 반응성 플라스틱으로 교체된다
이 자연표본은 우리 침구인들에게는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12경락의 유주의 방향이라든가 혈자리의 위치와 근육과의 관계, 운동기관과 장기간의 관계, 또한 다른 장기나 조직과의 관계와 같은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한 3차원적인 구조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해 준다.
사진이나 인조해부모형은 해부학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플라스티네이션은 부패와 탈수현상을 완벽하게 정지시키므로 이로 인해 인체의 내부는 전율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관찰자들은 어떤 종류의 불쾌한 냄새도 느끼지 못한다. 미세한 세부사항들을 보여주는 하나의 해부된 전신표본을 제작하는 데는 1,000시간 이상이 소요된다고 한다.
해부학은 인체를 부분 부분으로 나누어 보는 서양의학의 한 기초 학문이다. 전체성과 유기적인 관계를 중요시하는 동양의학의 한 지류인 침뜸의학을 공부하면서 인체의 역동적인 면을 연구하는 것이 우리의 충실한 자세일진데 경혈학을 배우면서 해부학은 왜 공부해야 하나 하는 의문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침뜸의학은 혈통학적인 측면으로 보자면 동양의학의 모태를 빌어 태어났지만 그 기능적 특성은 현대의학에서 필요로 하는 의료도구로서의 기능을 넘치도록 수행하고 있다.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의 물결이 충돌하고 있는 현대의학에선 어느 의료도구보다 탁월한 도구임이 증명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양(洋)의 동서를 불문하고 종횡무진으로 그 위력을 발휘하며 질병을 치료하고 있다. 이미 WHO에서도 침으로 고칠 수 있는 질병의 수가 300종을 넘는다고 발표한 지가 오래되었다.
이에 침뜸의학을 보다 더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는 침뜸의학의 과학성을 밝혀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를 객관화하는 작업이 해부학적인 견지에서 이뤄져야 하는 부분이 많이 있다. 하여 이번의 기회와 같은 첨단 해부학의 장(場)은 어느 분야보다도 침뜸의학에 관심을 갖는 우리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동일한 인체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관점은 굳이 Paradigm의 원리를 붙이지 않더라도 다를 수밖에 없을 텐데 서로의 바라보는 눈이 다르다 하여 한 쪽은 과학적이며 한 쪽은 비과학적이라고 단정을 해 버리는 일부 의료인들의 시각은 바뀌어져야 할 것이다. 오히려 수 천년동안의 경험으로 역사적 검증을 받아왔던 침구의 과학성이야말로 현대과학이 아직 규명해 내지 못한 미래 과학의 분야임을 알고 자성해야 할 것이다. 우리 뜸사랑 회원들 또한 나름대로의 침뜸의 과학화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현재의 실제 인체표본은 많은 기증자들 덕분에 가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생전에, 이 기증자들은 자신이 죽음을 맞게 되면 자신의 시신을 플라스티네이션화해서 의료인들을 교육시키거나 관심 있는 사람들을 가르치도록 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단다. 그들은 매장(埋葬) 권리를 일부러 포기하였다. 기증 이유도 그 인생만큼이나 다양하였지만 선의의 행동을 돕기 위한 방법으로 인체를 기증하려는 소망은 공통된 주제였다.
인체, 예술작품에의 기여를 원하는 이들도 있었고, 다음 세대를 도울 수 있는 방법으로, 또는 사후의 무덤 터를 유지 관리하는 것에 대한 부담 때문에, 또는 사후에 벌레나 작은 유기체에 의해 부패되는 것보다 좋기 때문에, 또는 자신의 몸에 대한 무시 학대를 벗어나 이에 대한 보상으로, 또는 과학의 발전에 대한 기증으로 평안과 행복을 느낀 이들이 많았단다. 영혼과 육신은 분리되나 생명은 신께 돌아가고 다시 새 몸과 새 생명으로 태어날 것을 감사하며 기꺼이 기증한 이들이었다.
이들에게서 느끼는 감동이 컸던 이유도 육체의 죽음까지 타인들을 위한 배려에 활용함으로써 영원하게 살아있는 불멸의 기(氣)를 만들어 놓고 간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영혼이 잠시 머물다 간 자리이므로 허전한 둥지일 텐데도 오히려 찬연한 빛으로 살아 오른 그들의 모습은 사랑을 남기고 떠난 이사자리였기 때문이리라.
그들의 영혼도 음(陰)과 양(陽)으로 나뉘어져 한 쪽은 이 곳에 남아있고 한쪽은 저쪽 세상에서 이곳 박물관을 응시하며 갖가지 이유로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과 그들의 관심에 어울리는 응답을 해 주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침구인에게는 더욱 중요한 경락의 의미와 경혈을 상기시키는 데 더욱 큰 의미를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생각 중에 문득, “침이 오토(auto)인지 몸이 오토인지는 몰라도 침이 몸에 닿기만 하면 갖가지 질병이 치유된다”던 구당 선생님의 말씀이 머리를 스쳤다. 그 말씀을, 침이 왜 오토라야 하며 몸은 왜 침에 오토로 작용해야 하는 지를 이러한 기회를 통하여 밝혀내라는 우리 후학들에 대한 영원한 숙제라고 생각해 보았다.
또 한 가지, “이전에도 유언 삼아 얘기했지만, 내가 죽거든 내 시신을 우리 뜸사랑에 기증할 거야. 어떤 방법으로든지 후대에 침뜸을 잇는 교육자료로 쓰여진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겠나?” 하신 말씀도 떠올랐다.
침뜸의 보급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망설이지 않으시는 구당 선생님의 모습도 분명 저들의 귀한 정신만큼이나 빛나실 날이 있으리라 생각해 보았다. 세계적인 ‘침뜸의학 박물관’에 지금의 저들과 아주 흡사한 모습으로 서 계실 것만 같은 상상을 해 보았다. 하여 70년 가까이 침뜸을 해오신 당신의 오장육부는 일반인의 그것에 비해 얼마나 다를 지에 대해, 또한 그곳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보여주심으로 더욱 확연해지는 침뜸의 효능을 저 세상에서도 가르치시지 않으실까 하는 허락 받지 않은 상상을 해보며 얼굴을 붉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