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page 일과 나
침 한 번에 사랑이 있고,
뜸 한 번에 인생이 있다.
한 손에 침을, 한손에 뜸을 들고
태어난 사람, 아흔세 살에도
침·뜸 전도사로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을 불사르는 구당 김남수 원장을
보노라면 그려지는 그림이다.
평생을 침과 뜸의 효능을 증명하고
그것을 널리 알리는 일에 바쳐 온
그는 이제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침·뜸의 놀라운 효능이며,
침·뜸 확산의 이유가 되었다.
구당(灸堂) 김남수 원장(이하 구당)은 올해 아흔세 살이다. 새벽 다섯 시면 어김없이 일어나서
여섯 시면 아침을 먹고 바로 침술원으로 출근한다. 이른 새벽임에도 늘 스무 명 이상의 환자들이 줄을 서 있다. 날마다 번호표를 나눠주고 쉰 명의 환자만 받는다. 새벽 여섯 시 무렵이면 번호표는 바닥이 난다. 침 한 번이면 어떤 병이라도 낳는다고 ‘침 한번 집’이라고 소문이 난 만큼 전국 곳곳에서 환자들이 찾아온다.
오후 다섯 시까지는 잠시도 앉을 틈 없이 뜸을 뜨고 침을 놓고, 또 환자와 끊임없이 이야기를
한다. 일과가 끝나면 그 다음부터는 줄줄이 기다리고 있는 손님을 맞아야 한다. 인터뷰도 이 시간에 서야 이루어진다. 손님들 가운데는 우리 침술과 뜸을 도입하려고 먼 나라에서 온 이들도 많다.
보통 밤 열한 시가 넘어서야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 시간도 바로 잠자리에 들 때가 없다고 한다. 밀린 원고 집필에 시간을 보내다 보면 새벽 한두 시를 훌쩍 넘기는 건 예사라 한다.
그렇지만 다음날 다섯 시면 어김없이 눈을 뜬다. 젊은 사람의 체력으로도 감당키 어려운 업무량을 아흔셋의 나이에 거뜬하게 소화하고 있다. 날마다 뜨는 뜸이 비결이란다.
구당은 은퇴할 나이가 지나도 한참 지났고, 경제적으로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 그럼에도 잠시도 쉬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는 2대째 가업을 이어 침구사가 되었다. 젊은 시절 그의 꿈은 침과 뜸으로 병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엄격한 자격시험을 도입해서, 그 시험에 합격하는 침구사에게는 ‘침 잘 놓는 집’이라고 표시로서 작은 주석으로 만든 문패를 달게 해서 누구나 쉽게 혜택을 볼 수 있게 하자는 구상이었다. 그 꿈이 있었기에 젊은 시절 침구사로서 그의 인생은 거칠 게 없어 보였다.
그런 그에게 시련이 왔다. 1962년 당시 정부는 접골사, 안마사, 침구사를 유사 의료업으로 인정한 ‘국민 의료법’ 제59조를 없애 버리고 자격시험 규정을 폐지했다. 보사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던 의사들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조치였는지도 모른다. 이로써 침구사 양성의 길이 막혀 버렸고, 구당의 꿈도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그 뒤로 구당의 삶은 침구사 양성법을 부활코자 하는 투쟁의 삶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침구사법이 없어진 후로 그걸 새로 만들기 위해 안 가 본 데가 없습니다. 장군치고 저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을 겁니다. 군부대마다 찾아다니며, 다친 장병들에게 침을 놓고 뜸 떠 주고 했거든요, 장군이 힘이 셀 때가 아닙니까. 멍석 깔고 지랄하는 것 빼고는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보았지만 결국 이루지 못했습니다.”
1979년 구당은 일생일대의 기회를 맞이했다. 그해 봄부터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불면증과 기미를 치료하려고 구당에게 침을 맞고 있었는데, 거의 날마다 정보부장 공관으로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그들 둘은 가까워졌다. 불면증도 치료되고 기미도 거의 사라져 가고 있던 중에, 제도가 잘못되어 침구술의 맥이 끊길지도 모른다고 구당이 울분을 토하자 김 부장은 몹시 안타까워하며,
박 대통령과 직접 만날 약속을 잡아 주었다. 1962년 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갑자기 사라져 버린
침구사 제도의 부활을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하라는 것이었다.
구당은 침구사 제도가 폐지된 이유와, 그동안 아무리 침구사법 부활을 청원해도 번번이 폐기되는 이유를 대통령께 직접 설명하려고 계획을 세웠다. 그 약속 날짜가 10월 30일이었다. 이번에는 뭔가 결론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0 · 26사태가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10월 25일 밤까지만 해도 구당은 김재규 부장에게 침을 놓고 뜸을 떠 주었다. 이튿날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10 · 26 사태로 침구사 제도의 부활은 또 다시 먼일이 되어 버렸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구당과 침·뜸 전파의 사명
그의 지극한 정성에 하늘도 감동했을까. 1980년 제5공화국 시절 천명기 보사부 장관이 침구사를 부활시키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침구사 제도를 부활시키겠다는 열망 하나로 살아온 지 20년 만에 얻은 희소식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이 그에게 가장 큰 위기가 되어 버렸다. 지나친 기쁨에 심장에 무리가 갔고, 그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동안 얻은 심장의 화의 기운을 침과 뜸으로
다스리고 지냈는데, 너무 기쁜 소식에 그만 긴장감이 풀려 심장의 화를 돋우고 말았던 것이다.
급히 가족들을 깨워 응급 뜸을 떴지만, 가슴이 답답함은 가시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뭔가 해놓고 죽어야 하는 것을…. 이것도 저것도 아닌 내 인생이
이대로 끝난다면 너무 허무하구나.”라는 말이 나왔다.
그길로 아들 등에 업혀 병원에 입원해 진통제를 맞고는 그대로 혼절했고, 3일 만에 깨어났다.
그때부터 40일 동안 산소마스크를 쓰고 지냈고, 다시 6개월 동안 심근경색 치료를 받았지만,
심장의 통증은 잡힐 기미가 없었다. 결국 죽음만 기다려야 할 처지가 되었다.
구당은 가족과 의료진의 만류에도 부득부득 우겨 퇴원했다. 그는 그나마 지금까지 숨이 붙어
있는 것도 입원하기 전에 뜸을 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마지막 기대를 걸어 볼 것도 뜸이라고 생각했다. 집에 도착한 그는 아들에게 뜸자리를 알려주고 뜸을 뜨게 했다. 뜸을 다 뜨고 1~2분
지나자 가슴의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7개월 넘게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통증이 한순간에 걷힌 것이다. 그는 정말 거짓말처럼 살아난 것이다.
한편, 그를 죽음의 문턱까지 몰고 갔던 침구사 부활은 이번에도 역시 유야무야 되어 버렸다.
그러나 구당의 침·뜸 전파에 대한 사명은 그 어느 때보다 확고해져 있었다.
‘배워서 남 주자’의 정신으로 부활한 침· 뜸‘
“선진국에서도 침·뜸의 효능을 인정하고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활용하고 있는데, 정작 침의 종주국인 우리나라가 보수적인 사고에 막혀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외국에서 침술이 역수입되어 오고, 서양 전문의들이 침·뜸을 활용하게 되면 우리나라도
침과 뜸에 문을 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날이 올 때까지 침·뜸이 확산될 수 있도록 애쓴다면, 연젠가는 화려하게 꽃피울 것이라고 구당은 확신한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뜸사랑’이다. 뜸사랑은 침·뜸으로 무료봉사를 하는 단체다. 기존 의료계의 반발 때문에, 기존 의료 혜택을 받을 능력이 없는 생활보호대상자와 65세 이상 노인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현재 뜸사랑 회원은 2000명이 넘고, 한 해 10만 명 이상에게 침·뜸 봉사를 한다. 뜸사랑의 회훈은 “배워서 남 주자”이다.
뜸사랑에서 활동하려면 침·뜸에 대한 엄격한 교과 과정을 거치고, 정해진 시험에도 합격해야
한다. 1년 동안 진행되는 초급·중급·고급·인턴 과정은 정식 대학 과정 못지않게 치열하고, 자격시험도 고시 수준으로 엄격하게 진행된다. 이 시험에 합격해야만 비로소 봉사원 자격을 얻게 된다.
이들은 침·뜸으로 자신과 가족의 건강을 지키고, 더 나아가 인류의 건강한 삶에 기여한다는 포부가 대단하고, 봉사하는 삶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구당은 침구사 제도를 정식 법제화하는 꿈은 아직 이루지 못했지만, 침·뜸의 명맥이 끊기게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제 그는 자신이 살아서 이 세상에 해야 할
숙제를 어느 정도는 마쳤다고 생각한다. 침·뜸의 자발적 확산 시스템을 구축한 것과, 중국·일본은 물론이고 평양까지 넘나들면서 침술 교과서의 체계를 완전하게 정립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노벨상 백 개를 받아도 마땅하다고 여기는 ‘화상침’도 개발해냈다. 이는 침으로 화상을 다스려 통증없이 빠른 시간에 완벽하게 치료가 되게 하는 방법이다.
그의 화상침은 이미 세계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전 세계 사람들의 99퍼센트 이상이 살아가면서 화상을 경험하게 된다고 하니, 화상침의 가치는 갈수록 빛날 전망이다. 또 하나가 평생의 역작인 무극보양뜸이다. 단지 여덟 군데의 요혈에 뜸을 뜨는 것만으로 병을 치유하고 예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아무나 손쉽게 뜰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자신이 아흔셋의 나이에 젊은이처럼 일할 수 있는 비결도 바로 날마다 뜨는 무극보양뜸 때문이라 한다.
“죽기 바로 전까지 고통 없이 건강하게 일하다가 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침·뜸의 매력입니다.
오늘날 고령화 사회의 화두는 ‘어떻게 하면 나이든 사람들이 건강을 유지하면서 죽는 그날까지
일을 통해서 자신과 가족, 그리고 사회에 기여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가 될 것입니다. 침·뜸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구당은 민족 의술인 침·뜸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또 확산될 수 있게 하는 데 절대적 기여를 했다. 구당의 침·뜸 사랑은 오늘도 계속된다.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 한 손에는 침을, 다른 한 손에는 뜸을 들고 있고자 한다.
글_이원호(ejcoss@dreamwiz.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