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는 침구술과 첩약술이 근본적으로 다른 체계를 지닌 의술이기 때문이다.
한의계는 침구술과 첩약술은 동일한 철학적 토대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동일한 체계의 의술이므로 한의사가 침구를 시술하는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침구술과 첩약술이 동일한 철학적 토대(동양철학)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침구술과 첩약술이 가진 의학적 체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첩약술은 적절히 배합한 약초가 체내에 들어가 효과를 일으키는 화학 요법인 반면, 침구술은 침과 뜸으로 인체(경락과 경혈)를 자극하는 물리·자극 요법이다.

문헌에 의하면 첩약분야와 침구분야는 삼국시대(고구려)부터 별도의 분야로 구분되어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보다 적극적으로 전문의제도가 도입·운영된 것은 조선시대이며 더 정확하게는 세종 20년 이후라 할 수 있다. 세종은 매년 침구전문생을 선발해 전의감, 혜민국, 제생원에 배속시켰다.
전문의제도가 완성된 것은 성종 대에 이르러서였다. 성종 16년(1485년)에 완성된 『경국대전』중 의과취재(의과고시 또는 의과 시험에 관한 것) 부분을 보면 침구술의 취재가 첩약술 분야와 분리되어 있다.
이와 같은 의료체계적 전통은 일제가 안마술·침술·구술영업취체규칙을 만든 이후(1914.10) 법률화 되었고 대한민국 정부가 의료법으로 개정할 때(1962.3.20)까지 존치 되어왔다.

첩약술과 침구술을 통합한 것이나 한의사의 침구시술권만을 인정한다는 유권해석은 이처럼 역사적·의료체계적·법률적 측면에서 어긋난다. 뿐만 아니라 시대가 갈수록 인간생활의 모든 영역이 전문화되는 것을 감안할 때 시대적 추세와 직업 경제의 효율성에도 역행하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별도의 침구사제도 없이 침과 뜸과 약을 한의사 의지에만 맡겨두었을 때 결과는 불을 보듯 훤하다. 그것이 무엇이든 예속되면 침구술은 제도권 내에서 제대로 발전하기 어렵다.
천 년 가까이 이어져 내려온 전문의제도는 침술의 독창성과 전문성을 인정하는 제도이면서 아울러 이런 폐단을 방지하려는 정책적 배려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제도적 장치와 배려는 오늘날 더욱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